구리(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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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의 화합물은 청녹색을 띤 것이 많으나, 갑각류, 연체동물의 혈액에 함유되는 헤모시아닌은 인체의 헤모글로빈에 해당하는 녹색의 구리색소로서 색소를 운반하는 작용이 있다.

혈청을 칼럼 분리하면 얻어지는 셀룰로플라스민도 청녹색으로 1분자 중 7개의 구리를 가진 구리단백질이고 철의 대사에 관여하는 산화효소이다.

 

또 적혈구에 들어있는 저명한 금속효소의 수퍼옥시드지스무타아제는 구리 2개와 아연 2개를 가지고 초산화물의 불균화반응을 촉매하여 생체보호의 기능에 관여하고 있다.

 

구리는 금, 은과 더불어 인류가 가장 오래 전부터 알아왔고 사용했던 금속이다. 최고의 사용에 대해서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기원전 6000년 또는 아나톨리아 및 이란 고원지대에서 기원전 8000년기라고 하는 설 등, 발굴에 따라 연대가 거슬러 올라가는 경향에 있다. 이들은 출토층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에 의해 있으므로 오차도 있으나, 구리의 기원이 고대오리엔트에 구해지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초기의 구리는 자연동(自然銅)으로 두둘기거나 (단조)연마하기도 하여 핀․바늘․추와 같은 것을 만들어 왔다. 그러다 열로 가공하는 것이 쉽다는 것을 알고, 더욱이 고온에서 융해하는 것을 알고 주조기술을 획득하였다.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목탄과 불의 사용에 산화물 또는 탄산염의 광석을 환원하여 금속동을 얻는 제련기술이 개발되자 구리의 생산량이 커짐으로서 곧 다른 금속 특히 주석과의 합금이 주조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발전단계는 이란,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시리아의 지역에서는 거의 기원전 4000년기의 일이었다.

 

구리 및 그 주석합금인 청동의 사용과 문명의 여명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1836년에 덴마크의 C.J.톰센이 제안한 3시기구분법에 의한 청동기시대는 도시국가나 왕조가 흥하고 문자가 출현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인간의 공동생활이 일정레벨에 도달하기 시작하여 인력이 필요한 제련이나 제조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에는 상대편련(相對編年)이었던 3시기구분법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의 발명(1949년)으로 절대연대가 정해짐으로써 세계의 청동기시대를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문명발상지에도 개시시기에 시간차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대 오리엔트에서는 기원전 3200년경에 청동기시대에 돌입하고 기원전 1200년경까지 이어진다. 그 전의 신석기시대 사이에 금석(金石)병용의 동석기시대(기원전 4500~3200년)를 두는 것이 보통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열쇠와 말뚝 (청동, 열쇠 42.3cm, 말뚝 33.5cm) 기원전 2600~2350년, 시리아동부의 마리․이슈타르신전지 출토 [아레포박물관 소장] 아나톨리아의 시스트램 (악기, 높이 25.5cm, 폭 17cm) 기원전 3000년기말, 터키북부 홀로즈테페출토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 소장] 이집트 인더스모엔조다로브론즈 은하상로 되어 있다.

또 이집트는 주석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까운 중동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는 것이 많아지므로 대체로 병행하여 왔다.

동방으로 눈을 돌려 인더스문명에서는 3000년기 중엽 모엔조다로 유적에서 훌륭한 브론즈 제 춤추는 소녀상이 출토되고 있어 중동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청동기시대는 고대오리엔트에서 1500년 정도 늦었으나 정설이긴 하지만 최근의 발굴로 약간 빨라졌다.

기원전 2세기에 사마천이 사기(史記)에 기록한 은(殷)왕조는 금세기 전반의 갑골과 청동기의 출토에 따라 증명되었으나, 그 전의 하(夏)왕조에 대해서도 낙양(洛陽)의 동쪽에 있는 偃師二里頭 등 출토청동기로부터 상대조기(商代早期)로 되어 왔던 유적을 하(夏)로 생각되는 학자가 중국에 많아졌다.

더욱이 최근 발굴한 결과 산동성에서 감숙성에 이른 신석기시대 후기의 유적에서 구리의

하(夏) 또는 상대조기의 벼슬 (높이 14.7cm) 기원전 19~16세기[個人藏, Ancient Chinese Bronze Art (1991)]서 주춘 추청동기시대황 하반 첸운 남동 고 유물이 갈수록 출토되고 있다.

 

여기서 최근 중국고고학에서는 기원전 3500~2000년을 금석병용시대, 기원전 2000~기원전 5세기의 하(夏)․상(商)․서주(西周)․춘추(春秋)의 시대를 청동기시대로 하는 것이 대세가 되어왔다. 여기서 상(商)이라고 하는 것은 기원전 16세기경부터 황화 중하류역에 왕조를 연 부족의 이름으로, 특히 기원전 1300년경부터 기원전 11세기까지는 도성이 안양(安陽) 근교로서 은(殷)으로 불러왔다. 한편 기원전 11세기에 상(商)을 뒤엎은 서방의 세력이 서주(西周)이다.

 

은(상)주 청동기라고 불리우고, 미술품으로서 진중되고 있는 찰기(札器)는 이들 양시대의 제품이다.

황하 중하류역에서 떨어진 중국 및 주변지역에서 고대청동기의 발굴이 줄을 잇고 있다. 1957년 태국 북동부의 반첸에서 다수의 구리제인 투겁창, 도끼, 팔찌 등이 출토되었다. 연대측정은 기원전 2000년의 청동의 존재를 나타냄으로써 세계의 고고학계를 놀라게 했다. 1986년 중국 사천성 삼성퇴 유적에서 은대의 청동기군이 발견되었다.

 

그 중 돌출한 눈, 높은 코를 가진 일군의 청동인두상(靑銅人頭像)은 출토예가 없이 이채를 발하는 것이었다.

사천성 남쪽에 있는 운남은 옛부터 태국, 라오스, 베트남과 공통의 동고*(銅鼓)라고 하는 청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반첸, 운남, 사천, 황화 중하유역 사이의 문화적․기술적 연관성이 있는 것이었을까?

 

한반도에서는 늦어도 기원전 1000년에 북방의 요령지방에서 청동문화가 반첸의 동두겁창 (길이 29.3cm) 기원전 2000~1500년, 태국․반첸출토 [반첸국립박물관 소장]

청동인두상 (높이 34cm) 상시대(기원전 16~11세기), 중국사천성광한시삼성퇴 출토[중국문물정화, 문물출판사(1990)에서]청동도동 탁한식경방제경고 분 성행하고 차차 남하하여 무기나 거울을 만들게 된다.

 

일본 최고의 구리제품으로는 야마가타(山形)현 미사키(三崎)산에서 출토한 전길이 26cm인 청동도(靑銅刀∶도쿄국립박물관 소장)가 있으나 그 계보는 불명확하다.

일본열도의 청동문화는 야요이(彌生)시대 전기의 기원전 2세기경에 한반도의 세형동이기(細形銅利器∶칼, 투겁창, 꺽창) 및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이 들어있을 때부터 시작된다. 기원전 108년 평양 부근에 전한의 낙랑군이 설치되고 난 후부터 한(漢)의 거울 또는 동화가 다량 들어오게 된다.

 

한편 일본산 청동기도 야요이시대 전기말(기원전 2~1세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우선 한반도의 동이기를 모방해서 만든 제품, 거기에 한국식 소동탁(小銅鐸)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 동탁(銅鐸)으로, 어느 것이나 대형화하고 본래의 용도를 이탈하여 제기(祭器)가 된다. 야요이시대 후기부터는 한식경(漢式鏡)의 방제경(仿製鏡)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고분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성행하였다. 

한편 동서(銅鋤), 동촉(銅鏃), 파형동기(巴形銅器)와 같은 소위 오리지널제품도 야요이시대 후기부터 고분시대에 이르러 만들어진다.

 

이와 같이 기원전 2세기부터 후 5~6세기까지의 일본열도에서는 상당한 양의 청동제품이 무기(武器)로서 제기(祭器)로서 또 수장레벨의 일용품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렇다고 이 시대를 청동기시대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야요이시대 초기부터 수입품의 철이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청동 원료의 대부분도 대륙에서 운반되어 왔다. 일본산 구리가 쓰인 것은 7세기 이후부터이다.

북반구의 여러 문명과는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신석기시대를 거쳐 금속문화를 전개한 것은 안데스(페루)문명이다. 기원전 1500년 이전의 유적에서 금의 작은 조각이 출토되었으나, 1990년대가 되어 북부의 쿤탈와시(유적기원전 1000~200년)에서 금과 구리의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잉카제국보다 전의 기원후 1000년기 사이에 청동기 제작이 성행한 것도 알려지고 있다.

이상과 같은 세계의 주요한 청동문화를 개관하면 기형(器形), 재질, 제법 등에 지역의 특색과 함께 여러 개의 공통요소를 생각할 수 있다.

 

(1) 원광석 근린에서 고도의 기술이 전달되는 경우는 별도로 하고 가공 또는 제련의 용이함에서 ①자연동→②산화동․염기성탄산동→③황화물광석의 순으로 추적할 수 있다.

(2) 화학조성 자연동에서 단조품은 수% 이하의 불순물을 함유한 구리이지만, 초기의 제련동에는 갖추지 않는 조성의 합금이 나타난다. 예로서는 중국 산동성에서 출토한 놋쇠의 송곳(기원전 2000년경), 트란스코카사스 지방의 비소를 ~10% 함유한 동기(銅器∶기원전 2000년기) 등이 있다. 이들은 동광석에 아연 또는 비소의 광석이 고의인지 우연인지 섞여서 제련된 결과로 추정된다.

 

청동기 시대로 들어서자 구리와 주석을 별개로 제련하고 혼합한 주석청동이 보통으로 된다. 중국에서는 은대부터 주석, 납의 청동이 쓰이는데, 이 전통기술은 후에 한반도 및 일본열도에도 전해졌다.

 

아연과의 합금인 놋쇠(황동)가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기원전 1세기 공화제 로마시대때 통화에 쓰인 오리칼크(orichalcum)를 별개로 하면, 단체의 아연이 인도에서 분리된 15세기 이후이다.

(3) 제련과 주조 양쪽공정 모두 연료용 목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초기에는 광석을 채취하는 장소에서 주조까지 이루어졌다. 그러나 도시나 집락이 확립되자 주조작업장은 주거에 가깝게 설정되고 운반에 편리한 잉곳*이 발명된다. 중동에서는 장방형으로 4귀퉁이가 돌출한 소가죽형의 구리잉곳(oxhide)이 출토되고, 중국에서는 한대의 제련유적에서 장방형과 원반형의 구리잉곳이 출토되고 있다.

 

(4) 주조법 실랍법(失蠟法∶cire perdue, 로스트왁스법)이 일반적이나 은주(殷周)청동기와 같이 복잡한 조합법이 발달한 지역도 있다.

(5) 용도 초기에는 석기 대신 생활용구였으나, 곧 무기․제기․찰기로서 왕국이나 집락의 유지 때문에 도구가 되고, 철기시대에 들어서자 관, 거울, 상(像)과 같이 수장이나 고귀한 사람의 소유물이 된다. 또 통화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흥미가 있는 것은 장식품으로 구리(청동, 놋쇠)제의 펜던트나 팔찌, 귀거리 등은 초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금의 대용으로, 또 도금하여(금동(gilt bronze)라고 부름) 사용되어 왔다.

 

이와 같이 고대의 청동기는 사회의 발전단계 또는 국가형태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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